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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명소와 먹을거리/지역명소

강경젓갈축제와 가볼만한 곳...성지순례 4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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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주에 금산인삼축제에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시간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요~^^

 

충남 논산시에는 축제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강경젓갈축제가 있구요.  그리고 딸기축제, 상월면 고구마축제, 연산면 대추축제, 양촌면 곶감축제 등이 있습니다.

 

상월면 고구마축제는 지난 일요일(9월 24일)에 끝났구요. 10월에 강경젓갈축제, 연산대추축제가 있습니다.

 

강경젓갈축제는 2017년 10월 18일(수)~10월 22일(일)까지 축제일정이 잡혔는데요.

 

오늘은 강경젓갈로 유명한 강경읍에서 가볼만한 곳 중 성지순례 4코스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코스 : 근대문화코스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 - 강경여중고(스승의 날 발원지) - 강경중앙초교 강당 - 빛의 광장 - 강경 구 연수당 건재 약방

- 본정통거리 -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강경역사관) - 객주촌 - 대동전기상회

 

2코스 : 상업문화코스

중앙전통시장 - 구 강경노동조합 - 근대역사전시관(강경제일감리교회) - 구 세무서장 관사 - 강경화교학교 교사와 사택

- 강경젓갈축제장 - 강경갑문

 

3코스 : 유교문화코스

임리정 - 죽림서원 - 팔괘정 - 황산근린공원(전망대) - 강경젓갈전시관 - 강경젓갈사거리

 

4코스 : 성지순례

강경젓갈사거리 - 강경갑문 - 강경포구 - 강경침례교회(최초예배지) - 해조문 - 옥녀봉 봉수대 - 박범신 작가 소설 "소금"의

배경이 된 집 - 구 식산은행 지점장 관사 -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 덕유정 - 강경성결교회(최초 신사참배거부)

- 성 김대건 신부 유숙성지(귀국 첫 사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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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젓갈 사거리 

강경갑문 

강경포구 

강경침례교회

(최초예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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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문 

옥녀봉 봉수대 

박범신 "소금"집 

(구)식산은행

지점장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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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경성결교회

예배당 

덕유정 

강경성결교회

(최초 신사참배거부) 

성 김대건 신부

유숙성지 

 

 

강경젓갈로 유명한만큼 출발선은 강경젓갈 사거리겠죠?! ^^

 

 

[1] 출발점~~강경젓갈 사거리~!!

 

 

여기가 강경젓갈 사거리이고 강경농협 태평지점 앞에 있는 쌈지공원입니다.  쌈지공원에는 <강경젓갈시장 관광안내>가 있으며, 전통새우잡이 통발탑(?)이 있습니다.

젓갈사거리에서 직전을 하면, (구)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강경역사관이 있구요. 좌측으로 가시면 젓갈축제장 본무대인 염천리 젓갈테마공원과 (구)강경노동조합(강경역사문화안내소)이 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324호,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에서 해방과 함께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강경포구가 번성하였기에 이러한 금융시설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건물을 보존하면서 강경역사관으로 이용중에 있습니다. 내부는 사진촬영금지라서 아쉽게 사진 한장 남기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최근에는 강경역사근대문화 조성사업 등이 진행중에 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323호, 구 노동조합]

 강경포구는 우리나라 3대 포구 중 하나로, 이 포구를 통해 전국으로 운송되었기에 노동조합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는 강경역사문화안내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염천리 강경젓갈테마공원]

2015년까지 강경젓갈축제장이 강경읍 금강둔치에서 행사를 하였으나, 2016년부터는 도심지인 이 곳에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강경젓갈테마공원은 염천교 앞, 노동조합 옆에 있는 공원입니다.


 

 

[2] 강경갑문


강경갑문 

서창배수장 



강경갑문은 등록문화재 제601호로 지정된 것으로 금강물의 유출입에 대한 수위를 조절하여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물입니다.  강경포구는 우리나라 3대 시장이며 운송수단 역할의 중심지로서 이러한 선적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물을 가두었던 여닫이 수문시설입니다. 현재는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서창배수장으로 이용중에 있습니다.

 

 

 

  

 

한편 서창배수장과 연결된 차단시설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경포구와 젓갈로 유명한 강경젓갈축제가 눈에 띄구요.

반대편 차단시설에는 역사속으로의 강경여행이라는 타이틀로 강경역사관(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과 옥녀봉, 강경포구 등이 홍보되고 있습니다.

 

 

 

[3] 강경포구

 

 

 

 

  

강경포구는 본류인 금강, 지류인 논산천과 강경천이 흐르는 곳으로 해상은 물론 내륙의 중요 교통수단이자 물류수송지로 크게 번성한 곳입니다. 강경포구는 조선말기 우리나라 3대 시장(평양, 강경, 대구)중 하나로 곡물, 수공업제품, 해산물 등이 유통되어 번성하였으나 현재는 포구의 기능은 상실되었습니다.

 

 

 

강경갑문 근처에 있는 서창교 부근에 옛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경포구(대흥천), 강경포구(금강)의 1870년대와 1930년대의 강경포구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강경포구입니다. ^^

 

 

 

 

[4] 강경침례교회(최초예배지)

 


 


 

기독교 한국침례회 국내 최초 예배지는 향토유적 제38호(2009년 11월 5일) 조선말기

 

조선시대 말기 강경과 인천을 배 타고 오가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 집사의 가택입니다. 그는 1895년 미국 보스톤의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파울링 선교사에게 침례(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1896년 2월 9일(일)에 이곳에서 5명(파울링 선교사 내외, 아만다 가데린 선교사, 지병석 집사 내외)은 첫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침례교 국내 최초의 예배지가 되었고, 기독교 한국침례회가 태동한 곳이 되었습니다. 또한 <강경침례교회>의 시작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1896년~1899년까지 파울링 선교사가 거처하였는데, 자녀 3남 1녀 중에 장남 고든 파울링이 1899년 사망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습니다. 그 후 1900년 스테드만 선교사, 1901년~1935년 최초 한국 침례교단을 조직한 캐나다의 펜윅 선교사가 원산에서 강경을 왕래하며 별세하기 전까지 거쳐했던 곳입니다.
 

 

[5] 해조문

 


 


 

논산시 향토유적 제24호

 

1860년에 제작된 암각문으로 강경읍 금강변 옛 강경포구 옆 옥녀봉 정상 부근에 있는 천연 바위 절벽에 가로 131cm, 세로 110cm의 음각 밀물과 썰물의 발생 원인과 시각, 높이를 기록한 조석표입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에 있었던 조석표는 시각의 변화만을 다루면서 물발의 세기를 언급할 뿐이었는데, 암각문의 저자 송심두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원리를 전통사상에 따라 풀이하고 처음으로 만조시각과 함께 물의 높이를 다루고, 또 그것을 계량화하여 표시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암각 해조문은 비록 소박하지만 현대 조석표의 두 요소인 시각과 높이를 모두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조석표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조문은 시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수심의 높낮이를 계량화하여 기록함으로써 현대적 조석표의 구성 요소를 구비한 획기적인 것입니다.  이런의미에서 우리나라 해양사에도 큰 의미를 가지는 조삭표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에 유서 깊은 포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포구에 누구라도 쉽게 보고 고기잡이와 항해, 소금 생산 등 해양 관련 모든 부문에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조문을 새겨 높은 곳은 강경포가 유일합니다.

 

 

 

[6] 옥녀봉 봉수대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었다. 금강물 감돌아 흐르는 강 언덕에 자리한 강경산은 예부터 풍치가 아름다웠고,

 

그 산정에는 수운정(垂雲亭)이라 부르는 정자와 함께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봉수(熢燧)란 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나라에 큰 일이 날 때마다 밤에는 봉(熢:횃불), 낮에는 수(燧: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통신방법이 사용된 것은 아득히 고려 의종때 부터인데, 조선의 세종대에 와서,

 

정식으로 체제가 갖추어졌다.

 

봉수의 간선은 직봉(職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은 내륙으로는 강계, 해안지방으로는 의주, 서남은 순천의

 

5개 처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우리 강경 옥녀봉 봉수대는 직봉 아닌 간봉으로 이웃 익산군 용안면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으로 연락했고,

 

노성 봉수대는 북쪽 공주군 월성산 봉수대로 전했다.

 

 

[7] 박범신 작가 소설 "소금" 배경이 된 집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인 '소금'의 배경이 된 집입니다.

 

 

 

 

 

 

 

 

[8] (구)식산은행 지점장 관사

 

 

안내표에는 "조선식산은행은 1918년 6개 농공은행을 통합해 창설한 은행으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경제 침탈의 양대 축을 이루었다. 옥녀봉 자락에 사택 단지를 만들고, 그 안에 지점장의 관사를 만들어 놓았으나 조선식산은행도 사라지고 그 관사와 사택들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 지점장 관사만이 남겨져 있다. 객주 김양현 고택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나무가 울창하고 담과 대문이 높아 내부가 들여다 보이진 않고 그저 우직해 보이는 겹처마 지붕만이 일식 목조 가옥 위로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처마는 여전히 그곳이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주위에 문의를 해보니 예전 모습이 아닌 사진상의 파란색 지붕이 건물이 관사라고 하더군요.

 

 

[9] (구)강경성결교회 예배당

 

 

(구) 강경성결교회 등록문화재 제42호

 

한옥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시기 건축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한옥교회의 현존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겅의 1:1인 정방형의 평면으로, 중앙 부분에 있는 나무 주초 위에 세워진 두 개의 고주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한 칸막이 교회입니다. 초기 한옥교회는 건물 전면에 별도의 문을 두어 남녀신자를 구분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기능에 충실한 평면의 변화와 상부 가구구조의 구성기법 등은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의 근대화에 따른 건축적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구 구조는 9량 구조로 일반적인 가구법에 따라 내부의 고주를 협칸의 기둥열에 맞춰 세우고 대들보와 퇴보를 걸면 상부가구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내부도 신랑(nave)과 측랑(aisle)으로 구분되어 공간의 활용도 용이합니다.  더욱이 강단 쪽의 고주 하나를 생략함으로써 화중석에서 강단을 향하는 시선의 장애를 없애고 강단 앞부분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기능에 충실한 계획 수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목조 건축에 있어 이러한 감주법은 구조에 대한 기술적 축적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당시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됩니다.

 

 

[10] 덕유정

 

 

덕유정은 옛 선현들을 본받아 국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건립된 것으로 1793년 정조 17년 경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덕유정은 1992년 10월 28일 논산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현존하는 민간 사정 중 가장 오래된 사정입니다.

 

 

 

[11] 강경성결교회(최초 신사참배거부)

 

 


 

 


 

 

최초신사참배 거부 선도기념비

 

우리나라 최최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1924년 10월 10일 강경신사창립기념일에 공립 강경보통학교 학생 62명과 김복희 여교사가 강경성결교회의 백신영 여전도사의 지도와 교육하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김복희 여교사는 강경성결교회 집사이며 주일학교 교사였고, 62명중 57명의 학생이 강경성결교회 옛 예배당(근대문화유산 42호)에 출석하였습니다. 이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를 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산사에 절하는 것은 무지한 미신이며, 미신에게 절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절할 수 없다"

이 사건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행계획은 1936년 이후로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김복희 여교사는 권고사직을 거부하고 면직을 당하고, 취조를 통해 학생들이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신앙고백을 통해 민족의 기개를 나타낸 역사에 길이남을 자랑스러운 민족사적인 사건입니다.  이에 이 사건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최초신사참배 선도기념비를 (2006년 7월 1일)에 세워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백신영 전도사는 1917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교) 졸업 후 성결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대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결사대장의 역할을 감당하다 투옥되어 옥로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 강경성결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습니다.

 

 

 

 

[12] 성 김대건 신부 유숙성지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었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께서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신 후 페레올 주교님과 더블뤼 안토니오 신부님 및 신도 11명과 함께 1845년 10월 12일 밤 8시경 강경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 곳에 도착, 유숙하셨던 곳입니다.  당시 구순오의 집으로 이곳에서 한 달 남짓 머무르시며 기도와 미사를 봉헌 하셨고 우리나라 전교의 발판을 마련하신 유서깊은 성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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